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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골리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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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프 골리코프는 러시아 제국 출신의 소련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과 전후 소련 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붉은 군대 정치 위원과 지휘관을 거쳐, 1940년에는 소련군 참모본부 정보국(GRU) 수장이 되었으나, 독일의 침공 징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비판을 받았다. 독소전 발발 후에도 여러 전선에서 지휘관을 역임했으며, 종전 후에는 정치적 요직을 맡아 군대에 대한 공산당의 통제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골리코프는 많은 훈장을 받았으며, 198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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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골리코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F.I. 골리코프 중장
1941년의 골리코프
본명필리프 이바노비치 골리코프
로마자 표기Pillipeu Ibanobicheu Golikopeu
출생지러시아 제국 페름 현 카미실롭스키 군카미실롭스키 보리소바, 쿠르간 주보리소바 (쿠르간 주) (현재의 쿠르간 주 카타이스키 구에 해당)
사망1980년 7월 29일
사망지모스크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소비에트 연방
안장지노보데비치 묘지, 모스크바
별칭(없음)
군사 경력
소속소련
군종소비에트 육군, 총정찰국
복무 기간1918년–1980년
최종 계급소비에트 연방 원수
지휘제6군
제10군
제4충격군
브랸스크 전선군
제1근위군
보로네시 전선군
참전제2차 세계 대전
르부프 전투
보로네시 전투
오스트로고지스크-로소시 작전
보로네시-카스토르노예 작전
오퍼레이션 스타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훈장 및 상훈
훈장레닌 훈장 4회
10월 혁명 훈장 1회
붉은 깃발 훈장 5회
수보로프 훈장 1급
쿠투조프 훈장 1급
노동적기훈장
붉은 별 훈장 2회
조국 봉사 훈장 3급
노동적기훈장
메달"노농 적군 20주년" 기념 메달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탄생 100주년 기념 메달
모스크바 방어 메달
스탈린그라드 방어 메달
독일-소련 전쟁 승리 메달
1941-1945년 위대한 애국 전쟁 20주년 기념 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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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창설 40주년 기념 메달
소련군 창설 50주년 기념 메달
소련군 창설 60주년 기념 메달
모스크바 800주년 기념 메달
기타
소속 정당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2. 초기 생애 및 경력

골리코프는 러시아 제국 페름 현의 보리소바 마을에서 러시아인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2] 그의 아버지 이반 니콜라예비치 골리코프는 토볼스크 주둔지의 의료 병으로 복무했다. 1918년 아버지와 함께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에 입당하고[2]붉은 군대에 자원 입대했다.[2]

그는 러시아 내전 기간과 그 이후 상당 기간 정치 위원으로 활동했다.[2] 1931년 연대장에 임명되었고, 1933년에는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대숙청 시기인 1938년에는 벨로루시 군관구 군사 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여 해당 지역의 군 지휘관 숙청을 감독했는데, 이때 게오르기 주코프와의 악연이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같은 해 말 해임되었다가 11월 빈니차 군 집단 사령관으로, 1939년에는 제6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제6군 사령관으로서 1939년 소련의 폴란드 침공에 참여하여 르비우 점령 임무를 수행했고,[3] 1940년 겨울 전쟁에도 참전했다. 1940년 6월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붉은 군대 참모차장 겸 정보국 국장을 지냈다.

2. 1. 러시아 내전 참전

1918년 4월, 아버지 이반 니콜라예비치 골리코프와 함께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에 입당했다.[2] 한 달 뒤인 5월에는 붉은 군대에 자원 입대하여 러시아 내전에 참전했다.[2] 그는 내전 기간 대부분 동안 정치 위원으로 활동했다.[2]

2. 2. 군사 교육 및 초기 지휘관 경력

1918년 붉은 군대에 입대하여 러시아 내전에 참전했다. 군사 교육으로는 1929년 고등 지휘 요원 완전화 과정을 수료했고, 1931년 군사 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1933년에는 M.V. 프룬제 명칭 군사 아카데미를 졸업하며 군사적 역량을 키웠다.

1939년에는 제6군 사령관으로서 서우크라이나 (폴란드)에서의 작전에 참가했다. 1940년 6월, 붉은 군대에 계급제가 도입되면서 중장 계급을 받았으며, 같은 해 붉은 군대 참모 차장이자 정보국 국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다.

2. 3. 폴란드 및 핀란드 침공

1939년, 제6군 사령관으로서 소련의 폴란드 침공 당시 서우크라이나 (폴란드) 지역 작전에 참가했다.

3. 군사 정보 책임자

1940년 7월, 필리프 골리코프는 정보 수집 경험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정보국(GRU)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스탈린 역시 골리코프의 자질 부족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해 2월 제18차 당 대회에서 스탈린은 골리코프를 염두에 둔 듯 "정보 요원은 경험이 없고 순진하다. 정보 요원은 악마와 같아서 자신조차 믿지 않아야 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4]

골리코프가 임명되기 전, 그의 전임자 5명은 모두 대숙청 기간 동안 총살되었거나 총살될 예정이었다. 특히 직전 국장이었던 이반 프로스쿠로프는 공식적으로는 겨울 전쟁 패배의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지만, 실제로는 소련군의 준비 부족 상태를 너무 솔직하게 보고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러한 상황은 골리코프에게 스탈린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하도록 만드는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 당시 스탈린은 히틀러가 1939년 체결된 독소 불가침 조약을 파기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골리코프는 1941년 초부터 독일의 침공 가능성에 대한 여러 정보 보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중요성을 축소하거나 왜곡하는 경향을 보였다. 예를 들어 1941년 3월 20일, 그는 "소련과의 전쟁 가능성에 관한 대다수의 정보 보고서는 앵글로-미국 출처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목표는 의심할 여지 없이 소련과 독일 간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평가 보고서에 서명하기도 했다.[5] 이는 임박한 위협을 제대로 평가하고 대비해야 할 정보 수장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3. 1. 독일의 침공 징후 포착 및 경고

1941년 초부터 주요 정보국(GRU)은 독일 내부 정보원뿐만 아니라 영국미국 관리들로부터 독일의 소련 침공 가능성에 대한 여러 경고를 받기 시작했다.[5] 그러나 GRU 국장인 골리코프는 스탈린히틀러와의 불가침 조약이 유지될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경고의 중요성을 축소하려는 경향을 보였다.[4]

1941년 3월 20일, 골리코프는 당시까지 수집된 모든 정보를 종합한 평가 보고서에 서명했는데, 이 보고서는 "1941년 봄 소련과의 전쟁 가능성에 관한 대부분의 정보 보고서는 앵글로-미국 출처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목표는 의심할 여지 없이 소련과 독일 간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5] 이는 명백한 침공 징후들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1941년 4월부터 6월까지 소련 서부 국경 근처에 독일군이 지속적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들이 보고되었다. 골리코프는 이러한 사실을 상부에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이 보고에는 국경으로 이동 배치된 독일군 사단의 수(5월까지 70개에서 107개로 증가[5]), 전투력과 병력 규모, 부대 위치, 그리고 예상 공격 날짜(1941년 6월 22일)까지 구체적인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공격 날짜인 6월 22일은 약 15개의 신뢰할 수 있는 정보 출처에서 공통적으로 지목한 날짜였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리코프는 5월까지도 독일의 다음 군사 작전 목표가 소련이 아닌 지브롤터, 북아프리카, 근동 등 영국 세력권을 향할 것이라는 잘못된 예측을 유지했다.[5]

결과적으로 1940년 7월 골리코프가 GRU 국장으로 임명된 이후부터 독일이 침공한 1941년 6월까지, GRU는 독일군의 병력 증강 및 침공 준비에 관해 최소 95건의 경고성 정보 보고(기밀 해제된 문서 기준)를 소련 지도부에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 지도부의 오판과 맞물려 효과적인 사전 대비로 이어지지 못했다.[6]

3. 2. 스탈린의 불신과 경고 무시

1940년 7월, 골리코프는 정보 수집 경험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주요 정보국(GRU)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스탈린은 골리코프가 자격 미달임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해 2월 열린 제18차 당 대회에서 스탈린은 골리코프에 대해 "정보 요원은 경험이 없고 순진하다. 정보 요원은 악마와 같아서 자신조차 믿지 않아야 한다"고 언급했다.[4] 골리코프의 전임자 5명은 총살되었거나 총살될 예정이었고, 특히 직전 임명자였던 이반 프로스쿠로프는 핀란드 전쟁의 실패 책임을 져야 했지만, 실제로는 소련군의 준비 부족을 너무 솔직하게 지적했기 때문에 해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골리코프는 스탈린이 듣고 싶어하는 정보만을 보고하려는 강한 동기를 갖게 되었다. 당시 스탈린은 히틀러가 1939년에 맺은 불가침 조약을 파기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1941년 초부터 소련 정보부는 독일 내부 정보원, 영국 및 미국 관리들로부터 독일의 침공 위험에 대한 여러 경고를 받았다. 그러나 1941년 3월 20일, 골리코프는 당시까지 수집된 모든 정보에 대한 평가 보고서에 서명했는데, 이 보고서는 "1941년 봄 소련과의 전쟁 가능성에 관한 대다수의 정보 보고서는 앵글로-미국 출처에서 비롯되었으며, 현재 그 목표는 의심할 여지 없이 소련과 독일 간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이다"라는 내용으로 시작했다.[5] 심지어 5월에는 소련 국경에 주둔한 독일 사단 수가 70개에서 107개로 증가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상부에 보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골리코프는 독일의 다음 군사 작전 목표가 지브롤터, 북아프리카, 근동의 영국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1941년 4월부터 6월까지 골리코프는 소련 서부 국경 근처에 독일군이 계속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투입된 사단의 수, 전투력, 병력 규모, 위치, 그리고 구체적인 소련 공격 예상 날짜(1941년 6월 22일 - 이 날짜는 약 15개의 신뢰할 수 있는 출처에서 제시됨)까지 포함된 정보를 보고했다. 실제로 1940년 7월부터 1941년 6월까지 붉은 군대 총참모부 GRU는 독일군의 집결에 관해 소련 지도부에 95건의 메시지(기밀 해제된 정보 기준)를 보냈다.[6] 이처럼 골리코프는 침공 가능성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보고했지만, 스탈린은 이를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했다.

4. 제2차 세계 대전 (독소전) 참전

독소전 발발 이후에도 GRU 수장직을 유지하다가 1941년 10월에 물러났다. 그 사이 1941년 7월에는 영국 런던과 미국 워싱턴 D.C.로 군사 임무를 위해 파견되기도 했다.

1942년에는 브랸스크 전선을 지휘했으며,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시작될 무렵에는 안드레이 예료멘코 장군 휘하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지휘부를 볼가강 동쪽 안전지대로 옮기는 결정이 내려졌을 때, 골리코프는 도시에 남으라는 명령을 받자 극도의 공포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전선 정치위원이던 니키타 흐루쇼프는 "골리코프의 얼굴에 공포의 빛이 감돌았다... 나는 전쟁 기간 동안 군인이나 민간인을 통틀어 그처럼 끔찍한 상태에 빠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창백했고, 나에게 그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그는 '스탈린그라드는 멸망할 것이다'라고 계속 반복해서 말했다"고 회고했다.[7] 이후 골리코프는 모스크바로 소환되었고, 스탈린에게 흐루쇼프와 예료멘코의 처우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스탈린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1942년 10월, 그를 다시 보로네시 전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골리코프는 1943년 1월 보로네시-카스토르노예 작전을 지휘하여 보로네시를 탈환하고, 2월에는 별 작전을 통해 하르코프를 점령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1943년 3월, 하르코프 3차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하르코프를 다시 빼앗기자 주코프 원수는 그의 해임을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전선 지휘관에서 물러난 골리코프는 1943년 4월부터 종전 시점인 1945년까지 소련 국방부의 주요 인사 관리 국장으로 근무했다. 1944년 10월에는 소련 전쟁 포로 송환 문제 처리를 위한 위원회의 위원장으로도 임명되었다.

4. 1. 주요 전투 지휘

1939년 제6군 사령관으로서 폴란드 침공 당시 붉은 군대서우크라이나 점령 작전에 참여했다. 독소전 발발 이후 여러 주요 부대와 전선을 지휘했다.

시기직책비고
1941년 10월제10군 사령관
1942년 2월제4타격군 사령관
1942년 4월브랸스크 전선 사령관
1942년 7월보로네시 전선 사령관
1942년 8월 ~ 10월제1근위군 사령관스탈린그라드 전투 초기 남동(스탈린그라드) 전선 및 북서 전선 부사령관 겸임
1942년 10월보로네시 전선 사령관재임명



이후 니키타 흐루쇼프의 의견에 따라 전선 사령관 직에서 해임되었으며, 1943년 4월부터는 붉은 군대 인사 총국장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4. 2. 전쟁 포로 송환 담당

1944년 10월, 골리코프는 소련 전쟁 포로의 송환을 담당하는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그의 저서 굴라그 군도에서 골리코프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귀환한 소련 전쟁 포로들을 굴라그에 대량으로 수감하는 데 관여했다고 주장했다. 솔제니친은 "가장 큰 전쟁 범죄자 중 한 명인 골리코프 대장, 전 적군 정보국의 수장은 귀환자들을 설득하여 그들을 삼키는 임무를 맡았다"고 썼다.[8] 그러나 이후 공개된 소련의 기록 보관소 자료에 따르면, 솔제니친의 주장과 같은 전쟁 포로의 대량 수감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5. 전후 경력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골리코프는 주로 소련 국방부 내에서 정치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46년, 이오시프 스탈린의 의중을 따라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에 대한 비판에 가담했으며,[9] 이는 주코프의 첫 번째 실각으로 이어졌다. 1949년부터 1950년 사이에는 레닌그라드 사건에 관여하여 군 정치국의 책임자였던 이오시프 시킨을 해임시키는 데 기여했다.[9] 한편, 이 시기(1949년~1950년)에 골리코프가 잠시 투옥되었다는 불분명한 정보도 존재한다.

1950년에는 기계화 군단을 지휘했으며, 1956년에는 말리노프스키 기갑군 사관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1958년 1월, 주코프가 다시 한번 정치적으로 몰락하자 골리코프는 그 혜택을 받아 소련군·해군 정치 총국장 자리에 올랐다. 그의 주요 임무는 군대에 대한 소련 공산당의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었다.[9] 1961년에는 소련 방위군 원수로 진급했다.

그러나 1962년 4월(혹은 5월), 골리코프는 정치 총국장 자리에서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공식적인 이유는 건강 문제였지만, 실제로는 니키타 흐루쇼프가 추진하던 쿠바 핵 미사일 배치 계획에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9] 해임 이후 그는 소련 국방부 감찰관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정치적으로는 1961년부터 1966년까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제1기 및 제4기부터 제6기까지 소련 최고 회의 대의원을 역임했다. 골리코프는 1980년 7월 29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으며,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5. 1. 주코프 숙청 관여

1960년대 초, 소련 원수 골리코프


1946년, 이오시프 스탈린은 제2차 세계 대전 승리의 주역으로 칭송받던 원수 게오르기 주코프에게 쏟아지는 찬사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이러한 스탈린의 의중을 파악한 골리코프는 그해 6월 열린 군사 평의회 특별 회의에서 주코프 원수에 대한 상세한 비판을 제기하며 공격에 앞장섰다. 이로 인해 주코프는 공개적으로 굴욕을 당하고 비교적 낮은 군사 직책으로 강등되었다.[9]

이후 1958년 1월, 주코프가 다시 한번 정치적으로 몰락하자 골리코프는 이로 인해 혜택을 받아 소련군의 주요 정치국장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임무는 군대가 소련 공산당의 통제하에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었다.[9]

5. 2. 레닌그라드 사건 관여

1949년부터 1950년까지 골리코프는 레닌그라드 사건에 관여하여, 군대의 주요 정치국 책임자였던 이오시프 시킨을 해임시키는 데 기여했다.[9]

5. 3. 기타 군사 및 정치 직책



골리코프는 전쟁 후 소련 국방부에서 주로 정치적인 요직을 맡았다. 1946년, 스탈린이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에게 쏟아지는 칭찬에 불만을 품자, 골리코프는 군사 평의회 특별 회의에서 주코프에 대한 상세한 비판을 제기하며 그의 몰락에 기여했다. 이로 인해 주코프는 공개적으로 굴욕을 당하고 낮은 직책으로 강등되었다. 1949년부터 1950년까지는 레닌그라드 사건에 관여하여 군 정치국의 책임자였던 이오시프 시킨을 해임시키는 데 역할을 했다.

1950년에는 기계화 군단을 지휘했으며, 1956년부터 1958년까지는 장갑 전차 병 군사 아카데미의 교장을 역임했다. 1958년 1월, 주코프 원수가 다시 실각하자 골리코프는 그 자리를 이어받아 소련군·해군 정치 총국장이 되었다. 그의 주요 임무는 군대에 대한 소련 공산당의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1961년에는 소련 방위군 원수로 진급했다.

그러나 1962년 4월(또는 5월), 골리코프는 갑작스럽게 정치 총국장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공식적인 이유는 건강 문제였지만, 실제로는 니키타 흐루쇼프가 추진하던 쿠바에 핵 미사일을 배치하려는 계획에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9] 해임된 후 그는 소련 국방부 감찰관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이 외에도 골리코프는 1961년부터 1966년까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제1기, 제4기부터 제6기까지 소련 최고 회의 대의원을 역임했다.

6. 서훈

; '''소련'''

--레닌 훈장, 4회 수훈 (1941년, 1945년, 1950년, 1960년)
--10월 혁명 훈장 (1968년)
--적기 훈장, 4회 수훈 (1933년, 1942년, 1944년, 1949년)
--수보로프 훈장, 1급 (1943년)
--쿠투조프 훈장, 1급 (1944년)
--노동 적기 훈장 (1980년)
--적성 훈장, 2회 수훈 (1936년, 1970년)
--소련군 조국 봉사 훈장, 3급 (1975년)
--노동자·농민 적군 20주년 기념 메달 (1938년)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탄생 100주년 기념 메달 (1969년)
--모스크바 방어 메달 (1944년)
스탈린그라드 방어 메달
스탈린그라드 방어 메달 (1942년)
1941-1945년 대조국 전쟁 승리 기념 메달
1941-1945년 대조국 전쟁 승리 기념 메달 (1945년)
--1941-1945년 대조국 전쟁 승리 20주년 기념 메달 (1965년)
--1941-1945년 대조국 전쟁 승리 30주년 기념 메달 (1975년)
--일본 승리 기념 메달 (1945년)
소련군 재향 군인 메달
소련군 재향 군인 메달 (1976년)
무장 형제애 강화 기념 메달
무장 형제애 강화 기념 메달 (1980년)
--소련군 및 해군 30주년 기념 메달 (1948년)
--소련군 40주년 기념 메달 (1958년)
--소련군 50주년 기념 메달 (1968년)
--소련군 60주년 기념 메달 (1978년)
--모스크바 800주년 기념 메달 (1947년)
명예 무기
Почётное оружие с золотым изображением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герба СССР|명예 무기 – 소련 국장의 금색 이미지가 새겨진 샤슈카rus (1968년)



; '''외국'''

9월 9일 훈장
9월 9일 훈장, 2급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1971년)
백사자 훈장
백사자 훈장, 1급 (체코슬로바키아, 1947년)
1939-1945년 체코슬로바키아 전쟁 십자장
1939-1945년 체코슬로바키아 전쟁 십자장 (체코슬로바키아, 1943년)
두클라 고개 전투 기념 메달
Dukelská pamětní medaile|두클라 고개 전투 기념 메달ces (체코슬로바키아)
무장 형제 훈장
금 무장 형제 훈장 (동독)
국기 훈장
국기 훈장, 1급 (북한)
조선 해방 기념 메달
조선 해방 기념 메달 (북한)
북극성 훈장
북극성 훈장 (몽골 인민 공화국, 1947년)
적기 훈장 (몽골)
적기 훈장 (몽골 인민 공화국, 1945년, 1971년)
일본 승리 기념 메달 (몽골)
일본 승리 기념 메달 (몽골 인민 공화국)
할힌골 승리 30주년 기념 메달
할힌골 승리 30주년 기념 메달 (몽골 인민 공화국)
군국주의 일본 승리 30주년 기념 메달
Медаль «30 лет Победы над милитаристской Японией»|군국주의 일본 승리 30주년 기념 메달rus (몽골 인민 공화국)
몽골 인민 혁명 50주년 기념 메달
몽골 인민 혁명 50주년 기념 메달 (몽골 인민 공화국)
몽골 인민군 50주년 기념 메달
Медаль «50 лет Монгольской Народной Армии»|몽골 인민군 50주년 기념 메달rus (몽골 인민 공화국)
그룬발트 십자장
그룬발트 십자장, 1급 (폴란드, 1946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별 훈장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별 훈장, 1급 (루마니아, 1947년)
파시스트의 멍에로부터의 해방 기념 메달
Medalia „Eliberarea de sub jugul fascist”|파시스트의 멍에로부터의 해방 기념 메달ron (루마니아)
파르티잔 별 훈장
파르티잔 별 훈장, 1급 (유고슬라비아, 1946년)
인민 공로 훈장
Орден заслуга за народ|인민 공로 훈장srp, 1급 (유고슬라비아, 1946년)


참조

[1] 서적 Who's Who in Russia since 1900 Routledge 1997
[2] 웹사이트 Маршал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Филипп Иванович Голиков. Молодые годы. https://marshal-goli[...]
[3] 서적 What Stalin Knew, the Enigma of Barbarossa https://archive.org/[...] Yale U.P. 2005
[4] 서적 The Diary of Georgi Dimitrov, 1933-1949 Yale U.P. 2003
[5] 서적 What Stalin Knew
[6] 웹사이트 ГАВРИЛОВ Дмитрий Васильевич. ПРОЯВИЛ СЕБЯ КАК КРУПНЫЙ ВОЕНАЧАЛЬНИК... https://history.ric.[...]
[7] 서적 Khrushchev Remembers Sphere 1971
[8] 서적 The Gulag Archipelago 1918-1956 Collins 1974
[9] 서적 Power in the Kremlin Collins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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